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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에게 만연한 '실패하기 싫은 병'

일본인들에게 만연한 '실패하기 싫은 병'

 

세계를 누벼 온 만화가이자 문필가인 야마자키 마리 씨. 1년의 반을 도쿄에서, 남은 반을 남편의 고향집이 있는 이탈리아에서 보내고 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약 10개월 동안 도쿄의 자택 틀어박혀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택에서는 코로나 자체의 증상에 더해, 일본인에게 이미 만연해있던 다른 병까지 나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국가대표 팀은 왜, '드디어 골이다!'라는 시점에 볼을 서로 양보하는 걸까.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실패하면 추궁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일까? 조금 지난 일이지만, 주일 이탈리아 대사가 일본 대표 축구팀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스포츠 등을 통해, 골을 넣기 전의 결정력이 낮은 것은, 자주 지적받고 있었던 시절의 일입니다.

 

그 진의는 해당 분에의 프로들에게 맡기겠으나, '실패하고싶지 않다.'라는 멘탈리티는 현대 일본인이 품고 있는 큰 병이 아닐까요?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 대책으로 일본 정부가 급히 방침을 바꾸거나, 왠지 우왕좌왕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어도,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즉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을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이 일본인의 '실패하기 싫은 병'을, '어학 학습'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어학 학습에서 보이는 실패하기 싫은 병

 

제 이탈리아어는, 미술학교의 학업이나 피렌체에서 만난 사람들과 접하는 중에 익히게 된 것입니다. 학생 시절, 이탈리아어로 리포트나 논문을 썼었는데, 당시 스펠은 오타 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게는 완벽한 이탈리아어의 습득보다 만나고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우선 귀에 익숙한 단어부터 외우고, 언어화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었습니다. 즉, 전달되는 것이야말로, 언어를 활용한 커뮤니케이션으로 문법이나 스펠의 정확도는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어떻게는 몸에 익혀왔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그런 엉성한 어학 학습을 하는 저보다 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탈리아도 물론 그렇습니다만, 중동이나 남미 등, 대체로 적극적으로 회화를 하는 지역에서 언어의 허세 달인들을 많이 만나왔습니다. 두 마디, 세 마디라도 알고 있는 단어가 있다면 충분하고, 남성이라면, '곤니치와', '사요나라', '아이시테마스' 만으로도, 일본 여성과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욕과 상대에 대한 마음을 적은 어휘에 최대한 담아서, 분위기로 상대에 맞추어가게 됩니다.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보다 커뮤니케이션력이며, 상대를 알고 싶다,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모국어로서 사용하는 사람들과 사귀면서 점점 이해하게 되는 표현의 뉘앙스라는 것도 있습니다. 텍스트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곳에서 생활하고, 연애하고, 다투고, 일하며 살아가며 부조리를 경험하고... 진정한 언어능력을 익히기 위해서는 역시 '경험'이 불가결합니다.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

 

가족이 포르투갈에서 살게 되었을 때, 리스본 대학의 학생에게 아이의 가정교사를 맡겼습니다. 그 학생이 말하기를, 가장 언어를 가르치기 어려운 외국인이 일본인이라고 합니다. 일본인은 문법 실수를 안 하려고 지나치게 신중해져서, 좀처럼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법의 정확함에 집착하기 때문에 거꾸로 습득률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일본에서 이탈리아어를 가르치고 있었던 학생들에게도, 우선 문법의 정확성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어서, 회화를 하던 이탈리아 사람이, '당신은 간접 대명사를 사용하는 걸 좋아하는군요.'라고 쓴웃음을 보이며 당혹스러워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도중에 머뭇거리며, 더는 적극적으로 회회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본인이어도 허세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지한 사람은 표현에 끌려가며 회화가 막혀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의 입장이 되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제대로 일본어를 말할 수 없더라도, 문법이 엉망진창이더라도,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이쪽에서도 말하려고 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이해해주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문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의 합리성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전달하고 싶다.'라는 의사와 의욕이 최우선이 됩니다.

 

더욱이, 이 실패하기 싫어하는 멘털은, 언어뿐만 아니라, 보도 등을 통해서도 잘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보도는, 자신들의 나라에서 일어난 것을 항상 부감으로 파악하며, 비판도 서슴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정부나 행정의 조잡함이 명확하게 드러나면 '이탈리아라는 나라는 이래서...'라고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실패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그럼에도 같은 보도를 일본에서 한다면, 분명히 비 국민적인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군중 속에서 실 한 올 흐트러지지 않는 통일성이 있는 완벽한 사회라는 이데올로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신념이 일본에는 깊이 물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1964년, 올림픽 도쿄 대회에 출장한 마라톤 쓰부라야 선수는, 금메달에 대한 국민의 기대라는 압력과, 너덜너덜해져도 트레이닝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좋아하는 사람과의 결혼도 허락되지 않는 입장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마스다 아케미 씨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경기중에 중도포기한 것에 대해 '국민이 아니라는 욕설을 들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실패나 좌절을 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은 실패나 좌절, 굴욕으로부터 얻은 쓰디쓴 감정도 경험해야 성숙한 생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대의 일본에서는 그런 감정의 움직임을 '여론체'라는 실태가 없는 계율로 규정해버립니다. 그것이야말로 극단적인 사회주의나 종교적인 계율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처럼 실패를 규제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모습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에도의 촌민 문화의 상징인 라쿠고에서는 인간의 실패담이나 착각에 대한 이야기가 인기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인간 특유의 처참한 에피소드를 모두 껄껄 웃으며 나누고, 각자의 삶에 대한 힌트로 활용합니다. 열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에 분발하는 이전의 일본에서는 실패나 좌절, 틀을 벗어나는 것이 거꾸로 사회에게는 영양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