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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명문호텔 세 곳의 위기극복 방법이 주목받는 이유

명문 호텔 세 곳의 역사에서 배우는 '위기 극복 방법'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재난/종전 후의 상황을 지나오며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대로 관광산업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호텔 업계에서는 레스토랑 방문 고객 수가 회복세에 있기는 하나, 바 등을 운영하는 저녁 시간은 회복여 여의치 않다. 숙박업의 가동률도 떨어진 채로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각 호텔은 방문고객 수 회복을 위한 지혜를 모으고 있다. 예를 들어, 도쿄・마루노우치에 있는 도쿄 스테이션 호텔은 숙박 고객에게 조식 뷔페 서비스를 재개하였으나, 감염을 피하기 위해 모든 요리를 작은 접시에 나누어 담아주는 등, 서비스를 완전히 리뉴얼했다. 요리를 과하게 가져가는 일이 없으며, 미리 깔끔하게 담아 둔 요리를 테이블 위에 진열해 두면, 보기에도 좋아 호평을 받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중 생겨난 창의적 구상이라고 하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으나, 일본 호텔업계는 긴 역사 속에서 재난이나 전쟁, 버블 붕괴나 리먼 쇼크 등, 숙박이나 연회 수요가 급감하는 위기를 몇 번이고 헤쳐 나왔다.

일본 호텔업계를 견인해 온, 3개 명문 호텔의 창업 이후 역사와의 인연 속에서, 3개 호텔이 업계에서 선구적이라고 평가되는 상품이나 서비스 고안에는 방문 고객 수 저하에 대한 기사회생을 목표로 임직원들이 흘린 땀과 노력이 흘러넘치고 있다.

 


 

테이고쿠(제국) 호텔 : 결혼식이나 연회로 고객 모집, 뷔페도 발명

 

호텔(도쿄・우치 사이와이 쵸의 테이고쿠 호텔 도쿄)은, 올해 개업 130주년을 맞이하였다. 1890년 개업 시에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며, 2021년 NHK 대하드라마인'청천을 찔러라'의 주인공이 된 시부자와 에이이치가 창업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해외에서 방문하는 귀빈, 지금으로 말하자면 인바운드의 부유층을 맞는 민간 영빈관으로서, 국가(미야우치 성)이나 민간 대기업이 출자하는 국가적 프로젝트로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첫 오픈일의 숙박객은 겨우 5명이었다.

거기에서 테이고쿠 호텔은 연회나 레스토랑을 통해 활로를 찾았다. 망년회・신년회 접수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고, 식사료를 염가로 낮추었다. 숙박・음료 서비스・연회 3부문의 수익이 서로를 보완하는 일본식 시티 호텔 경영의 원점이 여기에 있다. 피로연에도 힘을 쏟아, 호텔 웨딩의 선구자가 되었다.

호텔 안에 우체국, 세탁소, 철도승차권 판매, 전용 택시 서비스, 가이드 등,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서비스도 20세기 초반에 구비되어 있었다. 호텔에서 직접 만든 빵도 도입되었다. 

1923년에 본관을 재건축 한 때에는, 개업 피로의 축하연 당일에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다.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면하면서, 설계자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함께 세계적 인지도를 높였으나, 주위는 기왓장으로 산더미가 되었다. 그곳에 이재 사무소, 피난 온 시민을 위한 무료 숙박소 개방을 실시하였다. 한 때는 미국 대사관도 자리 잡았으며, 신문사, 통신사의 임시 사무소도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연합국 군 총사령부(GHQ)에 접수되었으나, 거꾸로 이것을 기회 삼아서 외국인 고객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에 주력했다. 조리실의 위생기준이나 재해 예방의 지식 등, 당시에 선진적이었던 미국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배웠다.

호텔 레스토랑에 빼놓을 수 없는 뷔페를 시작한 것도 테이고쿠 호텔이었다. 북유럽의 전통요리인 '스뫼르고스보르'를 참고하여 1958년부터 '임페리얼 바이킹'으로서 제공을 시작하였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조식은 중지 상태)

 


 

호텔 오쿠라 : 보존운동까지 일어난 로비 복원

 

테이고쿠 호텔의 발기인 중 한 명이며, 회장까지 역임하였던 오쿠라 기하치로의 적자, 오쿠라 기시치로가 초대 회장에 취임한 것이 호텔 오쿠라(도쿄・토라노몬의 호텔 오쿠라 도쿄)이며, 1962년에 개업하였다. 서구를 모방한 것이 아닌, 세계에 통용될 진짜 일본의 특색을 낸 호텔로서 디자인되었다.

로비는 '조용하고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가장 중요시하였고, 넓고 큰 공간을 무료 라운지로 개방하고 있다. 매화로 장식한 5개의 의자와, 옻칠된 둥근 테이블, 천정에서 내려오는 조명 등, 일본 풍토나 전통, 문화를 빚어내듯 배치되어 있다. 

본관은 리뉴얼되어, 작년 The Okura Tokyo로서 개업하였으나, 고층 빌딩임에도 로비의 모습은 이전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비슷하며, 구 본관에 들어온 듯 착각할 정도라고.

오쿠라의 정신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로비의 의장은, 리뉴얼이 발표된 후, 국내외의 오쿠라 팬들로부터 순식간에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져, SNS에서 시작되어 web에서도 보존운동에 대한 의견이 성토되었다.

그러한 고객의 평가를 이전부터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뉴얼에 있어서도 로비의 재현에는 정성을 다하였고, 구 본관을 내진 보강하게 되면, 로비의 분위기가 무너져버리기 때문에 전면 리뉴얼을 결단했다고 하는 고집스러움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정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개업한 지 며칠 뒤에는 일본의 호텔업계에서 처음으로 단골 고객의 클럽을 만들었다. 국내 고객이 '오쿠라 클럽'이며, 1971년에는 외국인 고객이 회원인 '인터내셔널 클럽'(오쿠라 클럽・인터내셔널)을 발족하였다. 미국 대사관이 근접해있기도 해서, 역대 미국 대통령도 가입하였고, 초기 마케팅 수단의 주축이 되었다.

 


 

뉴 오타니 : 올림픽 불황 중에 태어난 '설날 플랜'

 

오쿠라 개업 2년 후, 1964년에 호텔 뉴 오타니(도쿄・기오이 쵸의 호텔 뉴 오타니 도쿄)가 오픈했다. 동년 10월의 도쿄올림픽을 맞이하여 증가하는 외국인 관광객을 예상하여 건설되었고, 올림픽 직전인 1964년 9월, 통상 공기의 절반(17개월)만에 완성되었다.

단기간 공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수도 작업이 어려웠던 화장실과 욕실을 일체화시킨 유닛을 먼저 만들어버리게 되어서, 공사현장에서는 방에 넣기만 하면 되는 '유닛 배스'를 세계 최초로 실용화하였다.

'일본 최초의 초고층 건축', '동양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 등, 앞서 소개한 두 호텔을 뛰어넘는 '일본 제일', '최대'에 신경을 썼으며, 개업 당시부터 Top level의 시설과 서비스를 추구해 왔다. 뉴 오타니의 초대 회장인 오타니 요네타로는 호텔 사업 참가를 앞두고,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기시치로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오쿠라에서 인원・노하우 면에서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최고층의 회전 전망 레스토랑(현재, 회전은 종료)은 오타니의 강력한 의지로 도입되었다. 모터리제이션을 예상하고, 건물의 입구부터 가능한 한, 안쪽으로 배치하여 차량을 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것도 오타니의 의향이다.

외국인 고객의 이용도 많지만, 먼저 국내 고객에게 주목한 것은 뉴 오타니이다. 올림픽 직후의 인바운드 감소로 객실이 텅텅 비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정월 플랜', '수험생 플랜' 등, 비수기에도 고객을 불러들이는 기획을 잇달아 내놓았다.

지금도, 대부분 매일같이 새로운 기획을 릴리스하는 것이 뉴 오타니의 특징으로, 최근에는 옥외 수영장 '가든 풀'을 골든 위크와 여름 시즌에 주/야간 개방하여, 인스타그램용 사진 촬영을 좋아하는 젊은 고객층을 모으고 있다. (올 해는 완전 예약제로 운영 중.)

호텔 업계도 외국 자본계 럭셔리 브랜드 대부분이 대형 호텔 체인 산하에 들어가, 일본 국내 세력이 수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어려워졌지만, 3개 명문 호텔의 국제적인 평가는 결코 낮지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완화되면, 국내외 여행객도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일본의 오모테나시(환대)를 세계에 어필하기 위해서라도, 3대 호텔을 시작으로 하는 국내 자본 호텔 브랜드가 계속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인가. 성공의 열쇠는 각 호텔의 끊임없는 창의적 발상에 대한 노력에 달렸다.